안녕하십니까?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대한민국 군대 범죄사에서 가장 참혹하고도 비극적인 ‘오해’가 불러온 피의 기록입니다.
1963년 가을, 강원도 인제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진 도끼날의 비명. 한 남자의 뒤틀린 복수심이 어떻게 아무 죄 없는 일가족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군대라는 폐쇄적 조직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고재봉 살인 사건 개요 (Official Summary)
- 사건 발생 일시: 1963년 10월 19일 새벽 2시경
- 사건 발생 장소: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제2군단 산하 관사
- 피의자: 고재봉 (당시 27세, 육군 일병, 탈영 상태)
- 피해자 명단:
- 이득주 중령 (당시 2군단 수색대대장)
- 이 중령의 처 (33세)
- 장녀 (11세), 차녀 (9세), 삼녀 (6세)
- 가사도우미 (18세)
- 범행 도구: 도끼 (사전 준비된 흉기)
- 범행 동기: 전임 거주자 박 소령에 대한 오인 복수심 (절도 누명 및 수감에 대한 앙심)
- 사법 결과: 1963년 12월 육군 고등군법회의 사형 선고, 1964년 3월 사형 집행
이 글은 당시 국방부 조사 자료와 언론 보도(나무위키, 위키백과 등 참조)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으로 특정인을 비방할 목적이 아님을 밝힙니다.
“억울합니다, 그 소령 놈이 내 인생을 망쳤단 말입니다!”
1963년 초,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어느 부대. 고재봉 일병은 박 소령의 당번병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대 내에서 신발과 물품이 없어지는 절도 사건이 발생합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다름 아닌 고재봉.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부대장이었던 박 소령은 냉정했습니다. 고재봉은 결국 육군 교도소에서 7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차가운 감옥 창살 너머로 그는 매일같이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나를 도둑으로 몰아? 내 인생을 망쳐놓고 너만 잘 살 줄 알았나?” 분노는 이성을 잡아먹었고, 그의 머릿속엔 오직 박 소령에 대한 피의 복수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출소하자마자 부대를 이탈하여 탈영병의 신분으로 인제로 향합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롭게 갈린 도끼 한 자루가 들려 있었습니다.
사건의 본격적 진행: “오늘 밤, 그놈의 숨통을 끊어놓겠다.”
1963년 10월 19일 새벽,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인제군 남면 어론리. 고재봉은 익숙한 길을 따라 자신이 예전에 당번병으로 드나들었던 박 소령의 관사로 접근했습니다. 담장을 넘는 그의 심장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두드렸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안방으로 향했습니다.
방 안에서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재봉은 이불 더미를 향해 도끼를 치켜들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무자비한 타격음이 들릴 때마다 선혈이 벽지로 튀었습니다. 그는 방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를 소거하듯 휘둘렀습니다.
박 소령이라고 믿었던 남자,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고재봉은 복수를 마쳤다는 광기 어린 희열에 휩싸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어이, 자네가 죽인 게 누군지 알기나 해?”
사건 발생 후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군 수사당국과 경찰은 비상경계태세를 갖추고 범인 추적에 나섰습니다.
고재봉은 범행 후 서울로 도주하여 은신하던 중, 수상한 행동을 눈여겨본 시민의 신고로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취조실에 앉은 고재봉의 표정은 당당했습니다. “박 소령을 죽였으니 여한이 없다”는 식이었죠.
그런 그에게 수사관이 신문지 한 장을 던져주었습니다. 신문 1면에는 처참하게 살해당한 일가족의 사진과 함께 명단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득주 중령,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자녀와 가사도우미.
고재봉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박 소령은? 박 소령은 어디 갔어?”
“아뿔싸, 내가 죽인 건 소령이 아니었다.”
진실은 잔혹했습니다. 고재봉이 교도소에 있는 동안, 박 소령은 이미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간 상태였습니다. 그가 살던 관사에는 새로 부임한 이득주 중령 가족이 이사를 와 있었던 것입니다. 고재봉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단지 ‘그 집’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면부지의 일가족 6명을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현장 검증을 위해 다시 찾은 인제의 관사. 고재봉은 자신이 휘두른 도끼에 스러져간 이들이 꿈에도 그리던 원수가 아니라,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인자한 군인이었다는 사실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피는 주워 담을 수 없었습니다. 오해로 시작된 복수극이 무고한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 셈입니다.
“법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나는 신을 만났다.”
고재봉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감옥에서 기독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는 “나는 백 번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라며 눈물로 회개했고, 감옥 안에서 수많은 죄수에게 전도를 하며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1964년 3월 10일, 그는 사형대 앞에 섰습니다.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군대의 인사 관리 시스템과 장병 정신 건강에 대한 큰 숙제를 남겼습니다. 단순히 ‘미친 살인마’의 소행으로 치부하기에는, 군 내부의 가혹행위나 억울한 누명, 그리고 허술한 관사 보안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 공식 입장 (1963년 당시 국방부 발췌)
“본 사건은 탈영병에 의한 계획적이고 잔인한 살인 사건으로, 군 기강 확립과 장병 교육에 엄중한 책임을 통감한다. 향후 군사시설 및 관사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장병들의 고충 처리 시스템을 재정비하여 이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줄평: “복수는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먹는 순간 나 자신까지 태워버리는 독약이다.” – 영화 ‘올드보이’의 정서를 빌려
사건 이후
고재봉은 체포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신속하게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육군 내에서는 장병들의 외출·외박 및 탈영병 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이루어졌습니다. 피해자인 이득주 중령의 유가족 중 당시 현장에 없어서 유일하게 생존했던 장남 이 부관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인제군 어론리의 해당 관사는 오랜 시간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불리며 방치되다가 현재는 철거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