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일병 실종 사망.. 강릉무장공비 침투(2)

강릉 무장공비 침투로 온 나라를 뒤덮었던 1996년 가을, 강원도 강릉의 산속에서 한 젊은 병사가 증발하듯 사라졌습니다.

군은 그를 ‘비겁한 탈영병’이라 낙인찍었고, 유가족은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 ‘죄인’이 되어 숨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우리가 차마 상상하지 못한 잔혹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국가가 외면했던 한 병사의 마지막 행적, 그 서늘한 기록을 지금부터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 글은 당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관련하여 발생한 **故 표종욱 일병 사건**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싸리나무 하러 간 애가 왜 아직도 안 옵니까?”

“표 일병, 걔 성격에 탈영할 놈 아닙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확실합니다.”

1996년 10월 9일, 강원도 양구군 민간인 통제선 인근. 육군 제2보병사단 공병대대 소속이었던 표종욱 일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선임병들과 함께 ‘싸리나무 채취 작업’에 나섰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겨울철 빗자루를 만들기 위한 그 고된 노역을 말이죠.

잠시 선임들과 떨어져 홀로 싸리나무를 베던 표 일병. 그런데 집합 시간이 되어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산 전체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서늘한 가을바람뿐이었죠.

당시 강릉은 북한 무장공비들이 침투해 온 나라가 비상계엄에 준하는 공포에 떨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부대의 판단은 이상하리만치 단호했습니다. **”무장공비가 여기까지 왔을 리 없다. 이건 군기 빠진 이등병의 탈영이다.”**

“군복과 전투화가 여기 있는데, 몸만 사라졌다고?”

“보십시오. 여기 버려진 군복이랑 전투화… 이건 명백히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도주했다는 증거 아닙니까?”

부대는 즉시 표 일병을 ‘군무이탈자’로 규정했습니다. 근거는 단순했습니다. 수색 도중 표 일병이 작업하던 곳 인근에서 그의 전투복 하의와 속옷, 전투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군 수사기관은 그가 공포심 때문에 혹은 사회가 그리워 옷을 벗어 던지고 인가로 숨어들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마치 잔혹 동화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옷가지를 하나씩 떨어뜨린 것처럼, 그 흔적들은 너무나 노골적이었습니다. 군은 이 흔적들을 ‘증거’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것은 누군가 설계한 ‘함정’이었습니다. 표 일병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보다는 그를 잡기 위한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습니다.

“자식 잃은 것도 억울한데, 빨갱이 도망가는 데 길 터준 죄인 취급까지 받아야 합니까?”

“우리 아들은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제발… 제발 우리 아들 좀 찾아주세요.”

표 일병의 부모님에게 들이닥친 것은 아들의 전사 통지서가 아니라 헌병대의 압수수색이었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숨어들지 않았는지,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았는지 취조가 이어졌습니다. 무장공비 침투로 온 국민이 날 선 신경을 곤두세우던 시절, ‘탈영병의 가족’이라는 낙인은 주홍글씨보다 무거웠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유가족은 숨을 죽였습니다. 군은 유가족의 호소를 묵살했습니다. “아들이 무장공비에게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의문은 “작전 지역도 아닌 곳에서 무슨 헛소리냐”는 고압적인 태도에 묻혀버렸습니다. 국가를 믿고 보낸 아들이 하루아침에 국가의 골칫덩이가 되어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였다. 산속에서 만난 남조선 군인을.”

“그놈 옷을 뺏어 입고 내려왔소. 시체는 근처에 대충 묻어버렸지.” – 생포된 무장공비 리광수(진술 내용 재구성)

진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1996년 11월 5일, 인제군 연화동 근처에서 도주 중이던 잔존 무장공비들과의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소탕 작전 끝에 사살된 공비들의 유류품을 정리하던 수색대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북한 공비의 배낭 안에서 **’표OO’**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시계와 군용 물품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제야 군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공비들의 진술과 노획된 일기장을 통해 드러난 진실은 참혹했습니다. 도주 중이던 공비 3명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있었고, 마침 혼자 작업 중이던 표 일병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표 일병을 기습해 잔인하게 살해한 뒤, 남한 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의 옷을 뺏어 입었던 것입니다.

표 일병은 탈영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협하는 적들과 마주해 홀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첫 번째 희생자’였습니다.

“국가는 당신을 잊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표 일병의 시신은 나뭇잎과 흙으로 대충 덮여 있었습니다. 그 추운 곳에서 한 달 넘게…

1996년 11월 19일, 표 일병의 유해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가 사라진 지 40여 일 만이었습니다. 발견 당시 그는 속옷 차림으로 얕은 구덩이에 누워 있었습니다. 군은 그제야 ‘군무이탈’ 처리를 취소하고 전사 처리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유가족의 가슴은 난도질당한 뒤였습니다. 군은 자신들의 판단 착오를 덮기에 급급했고, 사과보다는 ‘보상’과 ‘절차’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군대가 병사 한 명의 인권을 얼마나 가볍게 여길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얼마나 쉽게 개인을 희생시키는지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로 남았습니다.

국방부 공식 입장

당시 육군은 “무장공비의 침투 경로와 표 일병의 작업 위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대조 분석에 혼선이 있었다”고 해명하며, 뒤늦게 고인을 일병에서 상병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국립현충원에 안장했습니다. 또한, 유가족에게 수사 과정에서의 실책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표명했습니다.

한줄평: “가장 무서운 적은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등에 칼을 꽂는 무책임한 권력이다.”

[사건 이후]

사건 이후 故 표종욱 상병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국 군 수사 체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예단 수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당시 부대 지휘관들은 경계 실패와 수사 미비의 책임을 물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으나,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수준의 강력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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